제목: 불알 아파트
부제: 거세가 일상인 곳에서, 나만은 살아남고자 했던 한 후타나리 엄마의 기록
이 책은 ‘후타나리와 여자만이 존재하는 세계’라는 폐쇄적 설정 속, 특정 아파트 단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하드코어 디스토피아 심리 소설이다. 이곳에서 싸움은 곧 거세를 의미하고, 규칙 위반의 최종 징계 역시 거세다. 거세 방식은 잔혹하다. “불알을 으깨는 것”이 곧 이 세계의 가장 흔한 형벌이자, 오락이며, 권력의 언어다.
주인공은 아직 거세되지 않은, 그래서 언제나 위협받는 후타나리 엄마다. 이 아파트의 기본 규칙은 단순하지만 잔인하다. 한 가정에는 반드시 한 명 이상의 후타나리가 존재해야만 입주 자격이 유지된다. 복도에서의 자위는 금지되어 있으며, 지정된 자위실에서만 성적 해소가 허용된다. 입주민들끼리 시비가 붙어 싸움이 나면, 반드시 오후 9시 이전 공터에서 결판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 싸움은 언제나 한 사람이 거세되어야만 끝난다.
이 세계에서 후타나리는 태생적으로 강한 정복욕과 폭력성을 가진 존재로 인식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후타나리는 권력의 대상이자 곧 제거의 대상이기도 하다. 주인공 후타나리 엄마는 자신의 딸들—후타나리 딸 셋—을 키우면서, 그들의 성욕과 정복욕이 싹트기 전에 미리 거세해 버려야만 자신의 “불알”을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딸들끼리 싸우다 보면 결국 남은 단 한 명의 후타나리가 자신에게 칼을 겨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엄마”다. 피를 나눈 딸들을 사랑한다. 그 사랑과 공포 사이에서 그는 무너지고, 망설이고, 스스로를 속인다. 딸들을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사실은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거세를 고민하는 이 모순된 감정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 장력이다.
소설은 옴니버스 구조로 전개된다. 하나의 직선적 이야기보다는, 아파트의 다양한 사건들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교차하며 쌓여간다. 각 에피소드는 하나의 거세 사건, 하나의 가족, 하나의 선택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1장에서는 ‘후타나리 아파트’라는 특수한 공간이 정면으로 드러난다. 입주 조건, 공터 싸움, 자위실, 관리소의 강제 거세 제도가 서늘한 차분함으로 설명된다. 이 세계에서 거세는 예외적 사건이 아니라, 질서를 유지하는 가장 자연스러운 도구다. 사람들은 거세를 공포와 동시에 오락으로 소비한다. 누군가의 불알이 으깨지는 순간, 공터에는 비명과 함께 흥분과 웃음이 뒤섞인다. 후타나리 엄마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스스로의 불알을 어루만지며 다짐한다. “나는, 저렇게 되지 않을 거야.”
2장에서는 엄마와 딸들의 관계가 파고들어진다. 아직 성욕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어린 딸들을 바라보며, 엄마는 두 가지 상반된 상상을 한다. 하나는, 딸들이 건강히 자라 행복해지는 미래. 다른 하나는, 커다란 자지를 휘두르며 공터 한복판에서 누군가의 불알을 짓이기고, 언젠가는 자신의 불알까지 노리게 될 잔혹한 포식자로 성장하는 미래다. 거세를 할 수 있을 때 하지 못하는 것, 그 망설임이 곧 스스로를 향한 사형 선고일 수도 있다는 것을 엄마는 안다. 이 장에서는 엄마가 이웃들의 사례—딸을 먼저 거세하지 못한 대가, 반대로 너무 일찍 딸을 거세한 뒤 무너져버린 가정—를 목격하며 자기 기준을 만들어 가는 과정이 그려진다.
3장은 결정적 사건으로 치닫는다. 사소한 말다툼에서 시작한 첫째와 셋째의 싸움이, 공터에서의 ‘정식 결투’로 번진다. 아파트 규칙상 싸움을 시작한 이상, 끝은 항상 같다. 둘 중 한 명의 불알이 터져야만 싸움은 끝난다. 후타나리 엄마는 관객들 틈에서, 자신의 딸 둘이 서로를 잡아먹는 광경을 지켜본다. 첫째는 처음에는 머뭇거리지만, 점차 싸움의 쾌감과 관중의 환호에 취해간다. 그리고 마침내, 셋째의 불알을 손으로, 발로, 끝내 돌멩이로 으깨버린다. 그 순간, 셋째의 비명은 공포와 상실과 배신이 섞인 절규로 변한다.
이 장면은 작품의 정점이자 주인공의 전환점이다. 엄마는 셋째를 향해 솟구치는 연민과 엄마로서의 죄책감을 느끼지만, 동시에 숨겨왔던 또 다른 감정에 휩싸인다. “한 명이 줄었다”는 안도의 감각, 그리고 “첫째도 언젠가 나를 이렇게 할 수 있겠구나”라는 더 깊은 공포. 공포와 안도가 같은 자리에서 문지르듯 섞이면서, 엄마는 확신한다. 더 이상 망설여서는 안 된다고.
4장은 여파와 폐허의 서사다. 거세된 셋째는 한순간에 아파트 내 위계의 바닥으로 떨어진다. 불알을 잃은 자는 더 이상 진짜 후타나리가 아니다. 집단적 조롱, 은근한 따돌림, 절망에 빠진 셋째의 눈빛을 통해 독자는 이 세계에서 “성기능”이 단지 쾌락의 수단이 아닌, 존엄과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엄마와 첫째의 태도는 복잡하다. 엄마는 겉으로는 셋째를 돌보고 보살피려 하지만, 그 손길은 자주 머뭇거리고, 시선은 종종 셋째의 사라진 불알 자리를 피한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저렇게 되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끔찍한 안도가 튀어나온다. 첫째는 자신이 셋째를 거세했다는 사실에서 기괴한 우월감과 강렬한 쾌감을 느끼면서도, 밤마다 셋째의 울음소리에 시달리며 죄책감에 잠을 설치는 이중의 형벌을 받는다.
이 장에서는 엄마가 남의 거세를 바라보던 시선이, 이제 거세된 셋째를 통해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셋째의 절망은 곧 “거세될지도 모르는 나”의 미래로 보이며, 당한 자와 아직 당하지 않은 자 사이의 보이지 않는 경계가 서서히 흐려져 간다.
5장은 각 에피소드들이 모아지는 마지막 통로이자, 결코 닫히지 않는 문이다. 엄마는 이제 완전히 결심한다. 딸들을 사랑한다는 말 뒤에 숨겨왔던 진심—‘내 불알을 지키기 위해 너희를 제거해야 한다’—을 끝내 받아들인다. 그 과정에서 그는 보다 교묘해지고, 보다 잔인해지고, 보다 계산적으로 변한다. 딸들의 싸움을 방조하거나 촉발시키고, 규칙 위반을 은근히 부추기며, 관리소의 권력을 교묘히 이용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는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 거세를 당하면 또 다른 누군가가 입주하고, 공터 싸움은 매일 저녁처럼 반복되며, 자위실은 늘 줄이 길다. 관리소의 강제 거세실은 오늘도 일정표대로 돌아간다. 끝 장면에서 독자는 어떤 대단한 혁명이나 구조의 붕괴를 보지 못한다. 대신, 어제와 다르지 않은 하루가 반복되려는 찰나의 정적을 마주한다.
마지막 이미지는, 엄마가 아파트 창문에서 공터를 내려다보는 장면이다. 저 아래 어딘가에서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될 준비를 하고 있다. 누군가의 불알이 오늘 또 으깨질 것이다. 그는 자기 두 다리 사이를 향해 손을 뻗어, 아직 남아 있는 자신의 불알을 천천히 움켜쥔다. 살아 있다는 안도와, 언제든 빼앗길 수 있다는 공포가 같은 온도로 손끝을 타고 올라온다. 그리고 그는 중얼거린다.
“그래도… 아직은, 내 거다.”
이 책은 극도로 잔혹한 설정과 노골적인 거세 묘사를 통해, 신체의 자율성, 권력과 폭력, 사랑과 자기 보존 본능 사이의 모순된 감정을 끝까지 밀어붙인다. 동시에, 누군가의 상실과 파괴를 구경거리로 소비하는 집단의 잔인함과 무감각을 드러내며, 독자에게 단순한 혐오나 공포를 넘어, 쾌감·연민·죄책감·안도감이 뒤엉킨 복합적인 감정을 안겨주는 것을 목표로 한다.
아파트는 무너지지 않는다. 제도는 바뀌지 않는다. 다만, 그 속에서 살아남은 자들만이 자신의 불알을 쥔 손으로 떨리는 숨을 삼킬 뿐이다. 이 책은 그 떨림을, 끝까지 외면하지 못하게 만드는 이야기다.